아오모리명상여행기 '설국(雪國)을 찾아서'
글: 조송희(아침편지 가족)


얼음터널 안의 조송희님
지독한 추위였다.
낡은 흑백 TV 속에서 누군가가
36년 만의 강추위라며 와랑와랑한
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여고 1학년
이었던 그 겨울, 난 첫사랑의 설레임에
들떠 있었다.
“꽃편지는 내 마음처럼 분홍빛~
롯데가 전해 준 꽃편지 사탕~“
창밖엔 폭폭 눈이 쌓이고 그가 머무는 방의
라디오에선 시도 때도 없이 CM송이 흘러
나왔다. 그렇게 겨울은 가고 또 갔다.
빳빳하던 새 교복 칼라에 풀기가 빠져
나가듯 내 오랜 짝사랑도 세월 따라
조금씩 빛이 바래갔다.

‘깊은 설국의 체험,
푸른숲[靑林] 아오모리 온천 명상여행’
그것은 오래 전에 잊혀 진 줄 알았던 그 겨울의 초대장이었다.
‘아오모리’라는 말에는 입술을 오므리고 수줍게 속삭여야만 할 것 같은
비밀스러운 울림이 있다. 더구나 ‘푸른 숲’이라는 단어가 뿜어 올리는 서늘한
휘파람소리. 언제부터였던가? 거리에 찬바람이 일면 내 세포도 덩달아
비늘을 곧추 세웠다. 그 세포가 내 안에서 다시금 부풀어 오르며
아우성을 쳤다. ‘푸른숲[靑林] 아오모리’, ‘푸른숲[靑林] 아오모리...... ’
‘그래 떠나자. 눈 내리는 푸른 숲, 설국으로 가자!’

2009년 1월 14일 오후 1시,
작은 공항을 빠져나와 처음 만난 아오모리의 기온은 0℃, 빙점이다.
하늘은 짙푸르고 맑았다. “아오모리에는 지금 폭설이 내린답니다. 비행기 이륙이
지연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천공항에서 우리를 잠시 긴장하게 만들었던 그 제보가
거짓말 같다. 혼슈의 최북단에 위치하며 쓰가루 해협을 사이에 두고 홋카이도와
마주보는 아오모리 현. 우리의 함경도 정도에 자리 잡고 있다는 그 곳의 거리는
정결하고 고요했다. 나직나직하고 반듯한 집들. 소박하고 겸손한 도시다.

대도시에서는 사라진 일본의 오랜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곳.
그 아오모리 외곽의 고풍스런 식당에서 우리는 우동에 새우튀김을 곁들인
첫 점심을 먹었다. 잘게 썬 대파와 다진 생강을 넣은 우동국물은 뜨겁고 담백했지만
조금 밍밍했다. 익숙한 듯 낯선 이 맛. 비로소 일본 본류 깊숙이 들어왔다는 실감이 났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雪國)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雪國)’의 첫 문장이 떠올라
전류처럼 온 몸을 타고 흘렀다. 버스는 눈을 뒤집어 쓴 나무들이 만들어낸
순백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우리는 삶의 또 다른 경계를 넘어서서 드디어
눈의 세상에 다다른 것인가? 흰 빛으로 가득 찬 세상은 놀랍도록 정밀했다.
비현실적인 느낌이다. 숲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푸드득’날아 올랐다.
크리스털처럼 투명하던 공기가 쨍하고 부서졌다.
‘아~~!’
그때서야 차 안에서도 신음처럼 낮은 탄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핫코다산으로 가는 길, 몇 굽이 좁은 산길을 돌아서자 순식간에 바뀐 풍경이었다.

산꼭대기에는 눈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몸이 휘청거렸다.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들었다.
사진을 찍는 손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우리는 무심코 장롱 속에 숨어들었다.
얼떨결에 전혀 다른 세상으로 튀어 들어간 ‘나니아 연대기’의 아이들 같았다.
강력하고도 황홀한 추위였다. 산위에서 우리는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 곳은 신의 영역. 깊이 탐할 수 없는 신비의 세계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스키어들이 수빙 사이로 새처럼 우아하게 활강을 했다. 햇빛에
반사된 눈의 알갱이가 그들의 등 뒤에서 눈부시게 흩어졌다.

아오모리의 첫 새벽은 짙푸른 물감이 맑은 물에 몸을 풀듯
서서히 찾아왔다. 수묵화처럼 단아하게 그 자태를 드러내는 숲.
허공을 떠돌던 눈이 지친 듯 어깨위로 내려앉았다. 밤새 쌓인 눈은 깊을 대로 깊다.
용감한 일행이 알몸으로 눈밭에 누웠다가 뜨거운 탕 속으로 후다닥 뛰어든다.
몸에 묻었던 눈이 은비늘처럼 날리다 물 속으로 녹아내렸다. 쳐다보는 나까지
온 몸이 저려와 덩달아 비명을 삼킨다. 노천탕에 앉아 바라보는 푸른 새벽.
어젯밤 잠은 꿈도 없이 혼곤했다. 호텔은 핫코다산에서 멀지 않았다.
그 곳에서 만난 첫 온천. 일본 정찬인 가이세키요리를 처음 대하던
엊저녁의 감동이 새삼스레 밀려왔다.

눈으로 뒤덮인 첩첩산골 깊숙한 계곡에 은둔자처럼 낮게 엎드린 집 한 채,
아오니 온천이다. 오후 4시, 아오니 온천에는 일찌감치 어둠이 찾아들었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이곳의 밤은 두텁고 적막하다. 한 남자가 방마다
돌아다니며 호롱불을 밝혔다. 나뭇가지에 걸어둔 몇 개의 호롱불과
작은 동굴처럼 눈을 파낸 구덩이에 켜둔 촛불이 가로등이 된다.
이 밤도 창밖엔 소리 없이 눈이 내린다. 기억의 저편에서도
눈이 쏟아진다. 여행 내내 짝꿍이었던 그녀와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채 아물지 않은 서로의 상처가 애잔하다. 눈물이 난다.
‘투둑, 쿵...’ 가끔씩 지붕에서 눈이 떨어지는 소리가 골짜기를 울렸다.
우윳빛 별무리가 흐르던 노천탕에서 부르던 노래가 자꾸만 입안에서 맴돈다.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들고 홀로 울리라’

아득하다. 안온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어머니의 자궁 속에
다시 들어온 이 느낌, 행복한 여행이다. ★
2009/03/27 14:20 2009/03/27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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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복선 2009/04/07 04:51  삭제

    넘 멋져요! 하얀마음!파란마음!나도 다음기회에 함
    께가고파요.

  2. 영애 2009/07/16 14:31  삭제

    정말 멋져요 젊음이 있다면 아니 지금이라도 가보고 싶은 충동이~~~```

  3. 고원주 2009/08/05 20:07  삭제

    설국을 다시 읽는 기분입니다. 뼈속 깊은 추위마저 동경으로 이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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